[윤용진의 귀촌일기 122]
몇 달 전 친구가 책 한 권을 보내왔다. 친구가 책을 출간했나? 그런데 저자를 보니 친구는 아니고 조금 낯익은 이름이었다. 바로 친구의 아내가 쓴 그림책! 그 책은 색연필로 꼼꼼하게 그림을 그려 넣고 하루하루의 일상을 적은 그림일기였다.
평생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일! 누구나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예쁜 종이책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책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만 꾸다가 포기하고 만다. 자신의 꿈을 실행에 옮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그림을 제대로 그려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내 버킷리스트에도 ‘그림그리기’가 들어간 지 이미 오래전이니까. 그렇다고 그림그리기를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림이라곤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배운 게 전부이니 나 혼자 끙끙거려본들 어설픈 실력은 별로 향상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뒤늦게 그림을 배우러 학원에 다니기도 조금은 민망스러웠고. 그렇게 해마다 어설픈 그림 몇 장을 그리다가 내 스스로가 못마땅해서 포기하곤 했다.
친구 아내의 그림일기. 글을 쓰고 꼼꼼하게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윤용진
우리는 은퇴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은퇴 후에는 유난히도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진다. 먹고 살기위해 하루 종일 일에 매일 필요도 없다. 물론 처음에는 할 일도 많아 보이지만, 일 년쯤 지나면 예전의 사회생활은 정리되기 마련이다. 여행을 가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일상이 될 순 없고, 이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내야 한다. 앞으로 갈 길이 먼데, 남겨진 그 많은 시간들을 무엇을 하며 보낼까?
이럴 때면 “취미생활을 해 보세요.”라든지 “재미있는 일을 찾으세요.”라는 조언을 많이 듣는다. 말은 쉬운데 막상 내가 좋아하는 취미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남들 따라 여러 활동도 해보지만, 일 년도 채 안되어 구입했던 비싼 장비들은 창고에 쳐 박히고 만다.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뭘까?
“어렸을 때 자신이 좋아하던 일을 떠올려 보세요!”라고 조언을 하는 분도 계시다. 어려서 자신이 꿈꾸었거나 잘 하던 것이 취미가 될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꽤나 공감이 가는 말씀이시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나도 다시 그림을 그려봐야겠다!
“일상의 감성들을 글과 그림으로 소박하게 남기는 것이 기쁨”이라고 말한다. ©윤용진
그동안 내가 그려왔던 그림은 ‘아크릴 화’다. 아크릴 화는 수채물감에 아크릴 수지를 섞어 만든 것으로, 수채물감처럼 물에 섞어 쓸 수도 있고 건조도 빠르다. 또 유화처럼 덧칠도 가능해 수정이 쉽고 질감을 표현하기도 좋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한들 내 그림은 항상 뭔가 부족해 보였다. 혹시 유튜브를 보면 그림을 제대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유튜브에는 그림에 관한 수많은 영상들이 올라와있었다. 동영상 몇 개를 보니 관련 영상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법을 설명하고, 여러 기법들도 소개하고, 때로는 직접 시범도 보여주었다. 이제는 온라인상으로 필요한 정보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나 보다. 틈만 나면 관련 영상들을 보고 또 봤다.
모제스 할머니의 그림엔 그녀의 삶이 녹아 있다. 「제목: 설탕 만들기」 ©윤용진
그러다가 이번에는 수채화에 꽂히게 됐다. 아크릴화의 강렬함보다는, 그러데이션(Gradation) 기법이라고 물이 퍼지며 생기는 수채화의 은은함과 투명한 색상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수채화부터 그려봐야겠다!
나는 지금도 뭐든 꽂히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내가 아직 젊어서 그런가 보다. 곧바로 아마추어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했다. 바로 연장 구입하기! 수채화 그림물감과, 스케치북, 팔레트, 붓 등을 구입했다. 취미생활을 하려면 장비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래도 수채화는 다른 취미활동과는 다르게 비용도 별로 들지 않는 것 같다.
갑자기 배달된 화구를 보고 아내가 한숨을 쉬었지만 뭐라고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아내 역시 ‘캘리그라피’를 배운다고 최근에 이것저것 구입했으니까. 갑자기 우리 집에 예술 붐이 일어, 부부가 각자 방에 틀어박혀 뭔가를 그려내고 있다.
필요한 화구들을 구입했다. 그림은 나이 들어서도 계속 할 수 있는 취미다. ©윤용진
“설마 화가가 되려는 건 아닐 테고, 뒤늦게 그림 그려서 뭐하려고?”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면 먼저 ‘모제스 할머니’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그랜드마 모제스’(Grandma Moses)로 알려진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제스’(Anna Mary Robertson Moses, 1860~1961)는 미국의 국민화가로 불린다. 그녀는 전문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농부의 아내이자 할머니였고, 76세에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 관절염으로 바느질을 할 수 없게 되자 계속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손녀가 쓰다 남은 수채화 물감으로 처음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녀는 처음부터 화가가 되려고 그림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내가 살았던 삶을 그냥 화폭에 옮겼다”라는 말처럼, 그녀는 살아온 기억과 시간들을 붙잡는 방법으로 그림을 선택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그림에는 전문적인 기법보다는 지나온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그렇게 취미로 그린 그림을 집에 걸어두고,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아주 싼 값에 동네가게에 맡겨 팔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미술수집가가 그녀의 그림을 발견하게 되고, 뉴욕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지금은 다른 사람 그림을 베끼기에 급급하지만 언젠가는 내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 ©윤용진
내가 굳이 ‘그랜드마 모제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림을 그리려는 이유도 꼭 화가가 되기 위해서일 필요는 없다. 그저 나에게 남겨진 시간들을 허투루 쓰지 않고, 내가 재미있거나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솔직히 조금 늦은 감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모제스 할머니보다는 10년은 빨리 그림을 시작한 셈이다.
물론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먼저 기초부터 배워야 하고, 지금 당장은 남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베끼기에도 급급하다. 하지만 난 아주 시간도 많고, 또 그림 그리는 일이 재미도 있다. 더구나 그림은 나이 들어서도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 있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제법 그럴듯한 내 그림을 그려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먼 훗날, 글쓰기에 이어 그림 속에서도 내 삶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 알아? 계속 그림을 그리다보면 모제스 할머니처럼 101살까지 살게 될지? 연초부터 꿈을 야무지게도 꾼다.
▼윤용진 작가의 「귀농 귀촌인을 위한 실전 텃밭 가꾸기」를 만나 보세요. ▼
네이버 도서 상세정보를 제공합니다.
book.naver.com
글·사진=윤용진(농부·작가)
정리=더농부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