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농업 이야기 266]
기후변화의 역습 ‘붉은곰팡이병’ 주의보
찬장을 열어보니 식빵이나 귤에 푸르스름하게 곰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보통 눈에 보이는 곰팡이만 떼어내고 먹거나, 아까워하며 쓰레기통에 버리곤 한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는 ‘곰팡이’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두고 간 ‘곰팡이독소(Mycotoxin)’라는 사실이다.
곰팡이독소는 색깔도, 냄새도 없으며 끓이거나 볶아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지독한 존재다. 이는 국민의 식량 안보와 건강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농가와 국가 경제에도 막대한 손실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지독한 불청객, ‘곰팡이독소’에 얽힌 흥미로운 역사부터 밭에서 식탁까지 이어지는 깐깐한 관리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마녀사냥의 진짜 범인은 곰팡이였다?(곰팡이독소의 역사)
곰팡이독소가 과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흔적은 아주 깊고 치명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중세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성 안토니우스의 불(St. Anthony’s Fire)‘이다. 당시 사람들은 손발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환각 증세에 시달렸는데, 이는 ‘맥각균’이라는 곰팡이에 감염된 호밀로 만든 빵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유명한 ‘세일럼 마녀 재판’ 역시, 당시 사람들이 맥각 독소에 중독되어 보인 환각과 경련 증상을 마녀의 저주로 오인하여 벌어진 비극이라는 가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곰팡이독소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은 1960년 영국에서 발생한 ‘칠면조 X병(Turkey X disease)’이다. 영국 전역의 농장에서 10만 마리가 넘는 칠면조가 간 괴사 등의 증상을 보이며 집단 폐사했다. 역학 조사 결과, 범인은 브라질에서 수입한 땅콩박 사료에 번식한 아스페르길루스 플라부스(Aspergillus flavus)라는 곰팡이였다. 이 곰팡이가 대사 과정에서 뿜어낸 물질이 바로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천연 발암물질 중 하나로 꼽히는 ‘아플라톡신(Aflatoxin)’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계 각국은 곰팡이독소를 주요 식품안전 위해요소로 규정하였다. 오늘날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와 우리나라의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서 농산물 및 가공식품에 대한 곰팡이독소 잔류 허용 기준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하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후변화와 들판의 불청객, 붉은곰팡이병
최근에는 기후변화로 인해 국내 농산물의 곰팡이독소 발생 양상도 다변화하고 있다. 겨울철 기온이 상승하고 봄철 출수기(이삭이 패는 시기) 전후로 잦은 강우가 발생하면서, 밀과 보리 같은 맥류 재배 포장에서 ‘붉은곰팡이병(Fusarium Head Blight)’ 발생 빈도가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
(좌) 밀 붉은곰팡이병 (중) 곰팡이독소 오염 옥수수 (우) 곰팡이독소 오염 땅콩 © 국립농업과학원
붉은곰팡이는 곡물의 이삭을 마르게 하여 수확량을 급감시킬 뿐만 아니라, 생육 과정에서 데옥시니발레놀(DON), 제랄레논(ZEA) 등 다양한 푸사리움(Fusarium)계 곰팡이독소를 생성한다. 데옥시니발레놀은 섭취시 구토와 위장염을 유발하여 ‘구토독소’로 불리며, 제랄레논은 동물의 체내에서 에스트로겐과 유사하게 작용하여 가축의 번식 장애를 일으킨다. 붉은곰팡이병은 일단 이삭에 감염이 이루어지고 독소가 생성되면 수확 후에는 어떠한 물리·화학적 처리로도 돌이킬 수 없으므로 재배 단계에서 철저한 선제적 관리가 필수적이다.
골든타임을 사수하라: 재배 단계의 화학적 방제법
재배단계에서 맥류의 곰팡이독소 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병해충 관리 기술이 요구된다.
우선 씨뿌림 전 포장에 남은 벼 잔재물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벼 잔재물은 붉은곰팡이가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에 포자를 날려 보내는 가장 중요한 1차 전염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모작 시 유지류 등 붉은곰팡이가 기생하지 못하는 비기주 작물을 돌려짓기(윤작)하면 전염원의 밀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병 발생이 우려되는 경우에는 붉은곰팡이 전용 방제 약제를 1회 이상 살포하여 곰팡이독소 오염을 감소시켜야 한다. 붉은곰팡이균의 포자는 주로 맥류의 꽃이 피면서 벌어지는 틈으로 날아 들어와, 영양분이 풍부한 꽃밥에 안착한 뒤 이를 징검다리 삼아 이삭 내부로 침투한다. 따라서 약제 방제의 최적 골든타임은 ‘출수기부터 개화기’이다. 이 시기에 평균기온이 15∼20℃를 유지하고 2~3일 이상 강우가 지속되거나 상대습도가 80% 이상으로 높아지면 병원균이 폭발적으로 증식한다. 농가는 기상 예보를 예의주시하여 개화기에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될 경우, 비가 오기 전이나 갠 직후에 즉시 예방적 방제를 실시해야 한다.
적정 방제 횟수는 기상 조건에 따라 유동적이나, 일반적으로 1~2회 방제가 표준이다. 첫 번째 약제 처리 시기는 포장 전체의 이삭이 약 50% 정도 출수하거나 개화가 시작될 때 실시한다. 이후에도 비가 자주 오거나 습한 날씨가 이어진다면 첫 방제일로부터 7~10일 간격으로 2차 처리를 진행하여 방제 효과를 강력하게 유지해야 한다. 붉은곰팡이병 방제에는 곰팡이 세포벽의 에르고스테롤 생합성을 억제하는 트리아졸계(Triazoles) 살균제나 세포 호흡을 저해하는 스트로빌루린계(Strobilurins) 살균제가 주로 사용된다.
농촌진흥청 농약안전정보시스템에 작물별로 등록된 전용 약제만을 사용해야 하며, 약제 포장지에 명시된 희석 배수를 정확히 지켜야 한다. 더불어 수확 후 농약 잔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약제별 ‘수확전 사용가능일수’를 반드시 확인하여 안전사용기준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확 후 관리: 곰팡이 증식을 억제하는 건조와 저장
재배 단계에서 병해를 성공적으로 방제했더라도, 안심하기엔 이르다. 수확 직후의 곡물은 수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외부에서 유입된 곰팡이가 다시 번식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따라서 수확 후 관리는 곰팡이독소의 급증을 원천 차단하는 마지막 방어선이라 할 수 있다.
수확은 가급적 맑고 건조한 날에 진행하며, 수확한 곡물은 24시간 이내에 신속하게 건조 시설로 이동해야 한다. 곡류의 경우 수분 함량을 밀은 12%, 맥주보리 13%, 겉쌀보리 14% 이하로 빠르게 낮추어야 한다. 곰팡이가 생육하기 위해서는 기질 내에 곰팡이가 이용 가능한 수분인 ‘수분 활성도(Water activity)’가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어야 한다. 곡물의 수분을 권장 기준치 이하로 낮추면 곰팡이의 포자 발아와 균사 생장이 물리적으로 억제되어 독소 생성을 차단할 수 있다. 완전히 건조된 농산물은 온도 10~15℃ 습도 60% 이하가 연중 일정하게 유지되는 저온 창고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저장고 내부에서 발생하는 ‘결로 현상’이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크거나 창고 내 환기가 불량할 경우 곡물 표면이나 포대 내부에 물방울이 맺히게 되며, 이 국소적인 수분은 휴면 상태에 있던 곰팡이를 다시 활동하게 만들어 단기간에 고농도의 독소를 생성하게 하는 주범이 된다. 수확물 중에서 제대로 여물지 못한 미숙립, 깨진 파쇄립, 껍질이 변색된 이병립 등은 정상적이고 건전한 곡물에 비해 이미 곰팡이에 감염되어 있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따라서 저장 전이나 가공 전 단계에서 정선기나 색채선별기 등을 이용해 이러한 비정상 곡립을 물리적으로 정밀하게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전체 로트(Lot)의 곰팡이독소 오염도를 크게 낮추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좌) 잔재물 제거 (중) 약제 방제 (우) 저장고 내 온·습도 관리 © 국립농업과학원
밭에서 저장고까지, 체계적인 예방과 관리의 사슬
곰팡이독소는 일단 한 번 생성되면 물리적, 화학적인 조리 및 가공 방법으로는 완벽히 제거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물질이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한 후의 사후 처리보다는 병원균의 감염과 독소 발생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사전 예방적 관리가 농업 현장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다. 최근 기후변화로 인해 국지성 호우 등 강우 패턴과 기온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곰팡이독소의 발생 양상 또한 더욱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농업 분야에서는 작물의 파종 및 재배 단계부터 수확, 건조, 저장에 이르는 전 과정을 하나의 끊어지지 않는 사슬처럼 연결하여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에 따라 관리하고 있다.
재배 중에는 기상 조건을 세밀하게 관측하여 병 발생 골든타임에 맞춰 적기에 방제해야 하며, 수확 직후에는 농산물이 곰팡이 증식에 유리한 상태임을 인지하고 지체 없이 작물별 적정 수분 함량까지 건조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후에도 온·습도 컨트롤이 되는 저온저장고에 보관하는 등 매 단계마다 안전 관리 매뉴얼을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
‘곰팡이독소’라는 보이지 않는 위협은 그 발생 조건과 생물학적 특성을 ‘알고 나면’ 비로소 이를 제어하기 위한 일련의 체계적인 과정이 ‘보인다’. 결국 식탁에 오르는 안전한 농산물이란 자연이 우연히 주신 선물이 아니라, 변화하는 기후 조건 속에서도 포장에서부터 저장고까지 철저한 병해충 방제와 환경 제어 기준을 엄격하게 지켜내는 농업 현장의 깐깐한 관리 시스템이 만들어낸 값진 결과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독소와의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과학적 데이터와 현장의 땀방울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다.
(좌) 맥류 붉은곰팡이병 및 곰팡이독소 예방 리플릿 (우) 맥류 붉은곰팡이병 예방 카드뉴스 © 국립농업과학원
글=장자영 국립농업과학원 식물병방제과 농업연구사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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