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농업 이야기 249
더워진 한반도…벼농사의 살길은 ‘늦은 모내기’
오늘날 우리 농업이 직면한 큰 도전 중 하나는 바로 ‘기후변화’이다. 요즘 여름은 길고, 뜨겁다. 기상청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폭염일수는 과거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20일 남짓이던 폭염이, 지금은 해마다 50일 가까이 이어진다. 첫 폭염이 일찍 찾아오고 마지막 폭염이 늦게 물러나면서 여름이 사실상 한 달 이상 길어진 셈이다. 이렇게 계절의 리듬이 바뀌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이 바로 들녘이다. 특히 벼농사에서는 여름철 고온 현상이 심화하면서 쌀의 품질과 수확량에 예상치 못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예전에는 ‘평년 날씨’를 기준으로 농사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이제는 그 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재배 전략을 세워야 할까?
벼 생육단계마다 적정 온도가 다르다.
벼 생육단계별 적정 온도범위 ©국립식량과학원
벼가 자라는 몇 개월 동안 벼는 여러 단계를 거쳐 자라는데, 단계마다 좋아하는 온도가 다르다. 싹이 틀 때는 따뜻한 30℃ 안팎이 좋고, 새로운 줄기를 만드는 시기에는 29℃가 적당하다. 반면 쌀알이 여무는 시기에는 21∼22℃가 가장 알맞다. 최근 몇 년간 여름철의 가온 상승과 장기화는 벼의 생육 과정 중에서도 특히 여뭄 시기에 상당한 변화를 불러왔다.
과거에는 8월 중순 이후 기온이 점차 안정되어 여뭄에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지만, 최근에는 높은 기온이 계속 이어지면서 불리한 조건이 조성되고 있다. 고온은 벼가 밤낮으로 호흡하며 에너지를 과다하게 쓰게 하고 효소 활성이 빨리 떨어지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벼가 잘 익지 못하고, 속이 비거나 밥맛이 떨어지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논이 푸르고 이삭이 탐스럽게 패더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쌀알이 성글거나 심지어 쭉정이가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농업인으로서는 투입한 노동과 비용은 그대로인데, 쌀의 품질과 수량이 떨어지니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는 “벼가 언제 가장 잘 여무는가?”라는 관점에서, 재배 캘린더를 다시 짜볼 필요가 있다.
등숙기 기온에 따른 쌀알 외관 변화 ©국립식량과학원
왜 모내기를 늦게 해야 할까
기후변화에 따른 벼 재배시기 기간 설정 전략 ©국립식량과학원
이러한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 중의 하나는 ‘늦게 모내기’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벼의 이삭패는(이삭이 나오는) 시점을 한여름 고온기에서 상대적으로 서늘한 가을철로 이동시키는 데 있다. 벼의 생산량은 이삭 팰 때의 식물체 무게에 따라 약 26%, 여뭄기 광합성에 의해 약 74%가 결정되므로 벼농사의 성패는 여뭄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5월 중하순에 모내기를 한다고 하자. 이렇게 하면 품종에 따라 다르지만, 8월 중순에는 이삭이 팬다. 하지만 이때는 30℃가 넘는 폭염이 지속되는 시기다. 여물어야 할 때 너무 더우니, 벼는 알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지쳐버린다. 만약 모내기를 6월 초순으로 늦춘다면 어떨까? 벼는 자라는 초반에는 고온을 잘 견디므로 여름을 잘 나고, 8월 하순으로 이삭 패는 시기가 밀려나 벼알이 잘 여물 수 있는 온도인 22℃ 안팎이 된다. 즉, 벼가 힘들어하는 시간대는 재배 초기에 지나가게 하고, 가장 중요한 여뭄기는 비교적 서늘한 구간에 배치하는 셈이다. 단지 모내기 시기를 몇 주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벼가 겪는 환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이앙시기에 따른 생산량 및 품질 변동 ©국립식량과학원
늦은 모내기 실행을 위한 구체적 방안
늦은 모내기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감(感)에만 의존하기보다는, 기온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농가가 직접 기상자료를 모으고, 일일 평균기온을 다 더해가며 계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계산 방식은 “이삭 패는 시기를 이렇게 과학적으로 정할 수 있다”라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예시에 가깝다.
최근 5년간 우리나라 기상 평균을 보면, 벼가 잘 여물 수 있는 이삭 패는 시기는 대략 8월 22일 무렵으로 분석된다. 이 시점에 이삭이 패면 여물 때의 평균기온이 비교적 낮게 유지돼, 여뭄에 적당한 온도가 된다. 이보다 너무 이른 시기에 이삭이 패면 여전히 고온이 지속되어 여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반대로 너무 늦으면 가을철 저온으로 인해 쌀알이 충분히 여물지 못한다.
왜 8월 22일이 기준이 되는지를 조금 더 살펴보면, 최근 5년간 평균적으로 10월 17일쯤이 되면 하루 평균기온이 15도 아래로 떨어진다. 이 시점부터는 벼가 더 이상 제대로 익지 못하므로, 그 이전까지의 기간 동안 충분한 열량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삭이 팬 날부터 10월 16일까지의 평균기온을 모두 더했을 때 약 1200도가 돼야 벼가 완전히 여물 수 있는데, 이 조건을 만족하는 시점이 바로 8월 22일 근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날짜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벼농사의 핵심 기준점이 된다.
물론 지역에 따라 이 시기는 달라진다. 해발이 높은 내륙지역은 가을이 빨리 찾아오므로 이삭 패는 목표를 8월 22일보다 일주일∼한 달쯤 앞당기고, 남해안 지역은 상대적으로 따뜻하기 때문에 3일∼보름쯤 좀 더 늦추는 것이 좋다. 다만 너무 늦게 이삭이 팰 경우 15도 이하의 저온으로 인해 쌀알이 덜 여물 수 있으므로, 지역별 기상자료를 꼭 참고하여 결정해야 한다.
이렇게 지역에 맞는 이삭 패는 시기를 정했다면, 모내기 시기는 거꾸로 계산해서 정할 수 있다. 재배하는 품종이 모내기부터 이삭 패기까지 걸리는 기간을 알고 있다면 그만큼의 날짜를 이삭패는 날짜(예를 들어 8월 22일)에서 빼면 된다. 만약 이전 재배 이력이 없어 정확한 생육일수를 모른다면, 해당 시군 농업기술센터에 문의하면 주요 품종의 최근 모내기와 이삭 패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추후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최신 기상을 반영한 시·군별 적정 이삭 패는 시기(기준점)를 제시하고, 도기술원 및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농가에 2026년 하반기에 안내할 계획이다.
기후변화는 되돌리기 힘들지만, 농사의 시간표는 바꿀 수 있다. 기후가 바뀌면, 농사도 달라져야 한다. 벼농사의 새로운 전략은 ‘타이밍’이다.
글=양서영 국립식량과학원 재배생리과 농업연구사
정리=더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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