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의 역사에서 왕이나 군주가 국가를 다스리던 때를 왕조시대라고 일컫는다. 이 시대의 권력은 철저히 혈통과 세습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했다. 왕이나 군주의 개인적인 성품이나 자질은 권력을 거머쥐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탓에 훌륭한 성군이 등장해 태평성대를 누리기도 했지만, 포악하고 잔혹한 군주들이 수없이 등장해 백성들의 피눈물을 쥐어짜기도 했다.
가혹한 형벌로 통치했던 중국의 진시황, 사화와 숙청을 일삼았던 조선의 연산군, 폭정의 상징인 로마의 네로 황제 등 역사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 이들을 우리는 ‘폭군(暴君)’이라 부른다. 원천적으로 세습된 권력을 쥔 폭군들에게는 통치의 일관된 논리나 거창한 국가적 목표가 부재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사적인 감정과 쾌락, 의심과 편집증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억압했다. 법과 관습은 왕의 기분 앞에 무용지물이었고, 신하와 백성을 자의적으로 짓밟아도 이를 견제할 제도적 장치는 전무했다. 폭군의 시대는 곧 한 사람의 불안정한 성정이 국가의 운명을 낭떠러지로 몰고 가는 야만의 시대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국민국가와 헌법, 선거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무자비한 권력자들은 ‘폭군’의 옷을 벗고 ‘독재자(Dictator)’라는 새로운 얼굴로 무대에 올랐다. 지난 세기에 인류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히틀러와 스탈린, 마오쩌둥 같은 인물들이 그 전형이다. 이들은 왕조시대의 폭군과 달리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와 정당성을 밟고 권력의 정점에 섰다. 하지만 권력을 쥔 이후에는 폭력과 학살, 대숙청과 공포정치를 통해 반대파를 억압하며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권력 남용과 억압이라는 본질에서 이들은 왕조시대의 폭군과 샴쌍둥이 같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과거의 잔혹한 군주를 폭군이라 부르고, 근대 이후의 포악한 권력자를 독재자라 부르는 것일까? 그 차이는 권력이 출발하는 궤적과 제도를 대하는 방식에 있다. 고대 그리스의 ‘티라노스’에서 유래한 폭군은 정당한 질서를 벗어나 개인의 의지로 권력을 행사하는 자를 뜻한다. 반면, 독재자는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았던 공식 직책인 ‘독재관’에서 유래했다. 처음부터 악한 통치자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숱한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절대권력’을 쥔 지배자로 의미가 완전히 변질되었다.
독재자는 현대에 들어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의 이름으로 권력을 얻은 뒤, 의회와 사법부를 무력화하고 언론을 길들이며 헌법을 권력 연장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통치자로까지 정의가 확장됐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국가의 독재가 과거의 폭군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으로 위험한 이유가 드러난다. 폭군의 시대에는 미치광이 왕 한 사람의 기질이 나라를 망쳤다면, 현대의 독재는 민주주의라는 번듯한 외피를 두르고 합법의 이름으로 제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권력자가 애초부터 선한가 악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자가 악해지거나 폭주하려 할 때, 그를 제어할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느냐의 문제다. 의회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법부가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언론의 비판기능이 위축되고, 정치적 반대자를 타협의 대상이 아닌 ‘척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할 때, 독재의 씨앗은 이미 싹을 틔운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와 민주적 제도의 형해화로 규정할 수 있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 상황을 돌아보면 기시감을 지울 수 없다. 권력을 쥔 쪽은 법과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절차적 정당성만을 앞세워 독주하려 하고, 견제해야 할 의회는 합의와 토론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채 맹목적인 진영 호위 무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사법과 언론마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진영의 도구로 동원되는 현상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군은 태어나는 것이지만, 독재자는 민주주의 외피를 입고 등장해 그것을 붕괴시킨다.
송태섭 정치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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