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는 물을 식히려고 할 때, 백 사람이 물을 퍼서 식힌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장작을 없애고 불을 끄는 것만 못합니다.”
중국 전한 시대의 문장가인 매승이 오왕 유비에게 올린 상소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근본적 원인을 무시하고 표면의 사건만 해결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의 인사 청탁 의혹 관련 대법원 선고(29일 예정)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자칫 잘못하면 함 회장이 하나금융그룹 회장직을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인 만큼, 금융권의 관심이 뜨거운 사안이다.
재미있는 점은, 함 회장이 받고 있는 ‘인사청탁 의혹’이라는 것이 함 회장의 자녀도, 친척도 아닌 KB국민은행 고위 관계자 자녀의 일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애끓는 부정도, 물보다 진한 ‘피’도 아닌 금융권의 ‘끈끈함’에 있었던 셈이다.
함영주 회장의 일로 조용병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 사건도 최근 다시 회자되고 있다. 조용병 전 회장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외부 청탁을 받은 지원자와 신한은행 임원 자녀 명단을 별도로 관리하면서 특혜를 제공한 혐의로 2018년 10월 기소됐지만, 2022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인사담당자에게 서류지원 사실을 전달했다는 것만으로는 합격 지시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금융권, 특히 은행의 인사비리 관련 문제는 하나금융과 신한금융만의 문제도, 함영주 회장과 조 전 회장만의 문제도, 심지어 ‘회장님’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뿌리깊은 관행과 금융권의 끈끈한 ‘관계’들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다.
2015년 KB국민은행의 신입 행원 선발 과정에서, KB국민은행 인사팀장 A씨는 VIP리스트를 넘겨받았다. 여기에는 최고경영진들 뿐 아니라 다른 상사들의 청탁을 받은 지원자들의 명단이 담겨있었다. 대법원은 2022년 1월14일 A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 사건에서 눈여겨 볼 지점은 1심의 판단이다. 1심은 이 사건에 대해 A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며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고 볼 사정이 없고 잘못된 관행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범행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결국 ‘관행’이었다는 것이다.
이번엔 2017년 우리은행이다.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우리은행 채용 과정에서 고위공직자, 주요 거래처, 은행 임직원들로부터 인사청탁을 받고 불합격권이었던 지원자들을 합격시킨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2020년 3월 이 전 행장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 전 은행장 역시 ‘개인적 이득’을 목표로 인사청탁을 받은 것이 아니다. 개인적 관계, 우리은행의 거래상 이득 등이 고려됐을 뿐이다.
물론 함 회장의 사건이 위 사건들과 같이 ‘대형 채용비리’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함 회장은 재판에서 인사부가 채용 기준을 어기면서까지 합격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인사에 영향을 미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저 ‘넌지시’ 말을 건넸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원 사실을 (인사부에) 알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생각이 짧았다”라며 후회하기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사법적 판단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는 없다. 함 회장의 의도를 함부로 추측하는 것 역시 섣부른 일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금융권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인사 청탁 관행, 그리고 금융권 인사들의 ‘끈끈함’을 정면으로 드러낸 사례라는 것은 분명하다.
함 회장은 1980년 서울은행 고졸 행원으로 입행해 하나은행장을 거쳐 회장에 취임한, 정통 ‘하나맨’으로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런 그가 KB국민은행 임원의 자녀 이야기를 듣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는 것은, ‘금융 엘리트’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동질감 속에서 형성된 네트워크가 전 금융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AI가 대출을 심사하는 시대다. 고객이 대출을 받을 때는 1원 단위의 소득 증빙과 AI의 냉혹한 신용평가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정작 그 은행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뽑을 때는, 그들의 끈끈한 관계에서 나오는 한 마디의 말과 쪽지가 더욱 큰 역할을 발휘한다. 첨단을 걷고 있는 금융이, 가장 구태의연한 방식에 발목이 잡혀있는 꼴이다.
매승의 상소문을 읽은 오왕 유비는, 결국 매승의 조언대로 근원적 문제(황제와의 관계 개선)를 해결하지 않고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가 3개월 만에 반란이 진압돼 사살 당했다.
함영주 회장 개인의 행동에 대한 사법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숨어있는 보다 근본적 문제를 천착해 들어가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신뢰’를 파는 금융이 해야할 일이다.
윤휘종 기자 / yhj@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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