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대구·경북 지역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삼성과 SK가 호남·서남권에 각각 수백조 원대를 투자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동안 우리 지역 정치권과 지자체는 무엇을 했느냐’는 자조 섞인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구미에 휴머노이드 양산 체계, 로봇 데이터 팩토리 등에 대한 투자가 배정되긴 했으나, 국가 대표 간판 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비켜간 데 따른 상실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왜 우리는 대기업 투자를 못 받았는가’가 아니다. ‘과연 대기업 유치만이 지역발전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길인가’이다. 물론 대기업 투자가 가져오는 막대한 낙수효과와 전후방 산업 연쇄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처럼 대기업-중소기업 간 수직계열화가 강한 구조에서는 대기업의 입지가 협력업체 유치로 이어지는 파급효과가 크다. 그러나 수도권 집중이 심화되고 주요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든 오늘날, 대규모 자본 투입이 곧 지역의 대규모 고용으로 이어지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처럼 고도로 자동화된 시설은 천문학적인 투자 규모에 비해 상시 일자리가 매우 적은 전형적인 ‘고용 없는 성장’을 보여준다. 반도체 공장처럼 비교적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 경우에도 핵심 인력이 전국 단위에서 충원되면서 지역에 정착하지 않거나 다시 수도권으로 빠져나가기 쉽다. 대기업 유치에만 목을 매는 ‘천수답식 지역발전 정책’이 지닌 한계다.
반면, 자체 역량을 갖춘 전문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것은 대기업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지역을 성장시킬 수 있는 독자적인 경로다. 이들은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기업과 종속적인 하청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지키는 파트너로 협력한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처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전문 중소기업들의 밀도 높은 집적과 협력을 바탕으로 거대 대기업 없이도 풍요로운 지역경제를 일궈낸 사례가 존재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내생적 발전 모델이 생소한 것은 지역의 풍토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정책과 산업구조가 대기업 중심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지역의 생존을 좌우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외부 대기업의 유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해법은 지역에 깊이 뿌리내린 중소기업의 ‘스케일업(Scale-up)’에 있다. 지역 중소기업은 외지 대기업과 달리 쉽게 지역을 떠나지 않는 높은 정착성을 바탕으로 지역 혁신 생태계의 허리를 이룬다. 이들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때 청년들이 원하는 고부가가치 일자리가 늘어나고, 고질적인 청년 유출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지역 기업들의 성장을 이끌어내려면 기존의 ‘유망산업’ 중심 지원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동안 지방정부는 시대적 유행에 따라 특정 미래 유망산업을 지정하고, 예산을 집중하는 공급자 중심의 정책에 매달려 왔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지역 기업들의 실제 역량과 수요를 충분히 반영하기 어려웠고, 소수 우량기업에 혜택이 집중되면서 산업 전반의 동반 성장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업종의 화려한 겉포장이 아니라, 성장 의지가 확고한 개별 기업을 정밀하게 진단하고 밀착 지원하는 ‘기업 중심의 정책’이다.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실적 수치에 연연하기보다는 기업이 성장 의지와 잠재력을 바탕으로 도전할 때, 정책이 이를 끝까지 믿고 뒷받침하는 유연하고 끈기 있는 동반자형 지원이 필요하다. 인재 확보와 기술 고도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병목을 정확히 찾아 해소하는 종합적이고 맞춤형인 핀셋 지원이 작동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독일 경제를 지탱하는 ‘히든 챔피언’과 같은 탄탄한 지역 강소기업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대기업 유치와 특정 첨단산업 육성을 외쳤음에도 지역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면, 이제는 그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역을 지탱하는 강소기업의 규모를 키우고 일자리를 고급화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실효성 있고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의 진정한 열쇠다.
김태운 경북대학교 행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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