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생, 이끼, 파인. 윤태호는 ‘사회를 해부하는 작가’다. 바둑판 위의 욕망을 그렸고, 산속 이끼 낀 권력을 파헤쳤으며, 악인들의 아귀 다툼을 담담한 필치로 묘사했다. 그런 그가 브랜드툰을 그렸다. 유한양행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NEW 일한‘. 카카오페이지에서 지난 3월 1일부터 매주 일요일 총 8화로 연재된 이 작품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삶을 ’드라마 피칭대회’ 형식으로 풀어낸다.
마지막화를 앞둔 지난 15일, 윤태호 작가를 만났다. ‘왜 2026년에 유일한인가’를 묻자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요즘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유일한 박사가 처했던 환경을 뛰어넘는 불확실성이 있을까요. 결국 내가 불안하기 때문에 세상을 불안하게 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일수록 ‘저 사람은 저 환경에서 어떻게 자기 내면을 쌓아왔을까’를 보는 게 중요한거죠.”

◇“첫 미팅을 마치고 자료를 펼쳤는데…지옥이구나 싶었죠”
1년 전 유한양행 측 제안에 흔쾌히 응한 건 친숙함 때문이었다고 했다.
“유일한 박사님은 저희 세대에서는 안티푸라민이나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로고로 너무나 익숙한 분이에요. 그래서 참여했죠. 그런데 첫 미팅 마치고 받은 자료들을 검토해보는데… ‘아, 지옥이구나’ 싶었어요.”
유일한 박사는 생전 자서전은커녕 인터뷰 한 편 남기지 않은 인물이다. 남아 있는 전기 대부분이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구성돼 있다. 직접 쓴 자료라고는 몇 통의 편지와 유언장이 전부다.
“너무 힘들었어요. 계속 ‘이게 맞나, 이분의 생각이 맞나, 이렇게 캐릭터를 말하게 만들어도 되나’ 고민하면서 글자 하나하나를 썼어요. 전기를 읽고 또 읽었는데도 답이 잘 안 보여서 스토리를 쓰는 데만 꽤 오래 걸렸어요.”
작중 1인 기획사의 김선호 대표는 투자자들 앞에서 유일한 박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피칭한다. 대형 기획사들이 이순신, 세종, 안중근 같은 ‘거인’들을 선점한 상황에서 작은 회사가 덜 알려진 위인을 들고 나오는 설정. 유일한이라는 인물 자체와 겹쳐 보이는 장치다.
“아예 나처럼 모르는 사람으로 하자고 결론을 냈어요. 유일한 박사님을 피상적으로밖에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려내자고요.”
김선호 대표를 돕는 최철 작가는 유한공고 졸업생으로 그렸다. “저는 유한양행의 가장 큰 사회적 기여가 학교 재단이라고 생각해요. 그 혜택을 직접 받은 사람이라면, 유일한 박사님을 먼 위인이 아니라 삶에 실제로 영향을 준 존재로 바라보겠죠. 그 시선으로 이분을 탐구해나가는 게 가장 솔직한 방식이라고 봤어요.”
피칭대회라는 설정에는 또 다른 층위도 있다.
“‘우리는 왜 자꾸 존경하는 인물을 멀리서 찾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까운 역사 속에 이런 분이 계신데, 왜 이분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못 들어봤을까.”

◇“조국이 뭘 해줬다고 이렇게 끝까지 붙들고 사셨을까”
윤태호 작가는 내내 유일한 박사의 동력이 궁금했다고 했다. 그 당시 미국으로 건너가 선진 교육을 받고, 현지에서 사업까지 성공한 사람이 왜 식민지 조국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걸었느냐는 질문이다.
“조국이 뭘 해줬다고 이렇게 끝까지 붙들고 사셨을까. 부인도 중국인이시고, 가치관이 흐려질 수 있는 지점은 많았어요. 안 지켜도 욕먹을 것 없었고요.”
그가 내린 결론은 ‘대체 아버지’, 즉 멘토였다. “유일한 박사님은 어렸을 때 부성을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셨잖아요. 분명 대체 아버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서재필 선생님이 그 역할을 하시지 않았나 싶어요. 그분 따님이 직접 유한양행 로고를 그려주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니까요.”
미국 의회를 대상으로 한국의 현실을 알리던 독립운동가들과의 연대. 그것이 나라 없는 시대에도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놓지 않게 해준 힘이었을 것이라고 윤태호 작가는 봤다.
“30년이 넘는 식민지 시절은 어떤 사람에게는 ‘바뀔 내일은 없어’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에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가치관을 유지했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박수받을 일이에요. 미국에서 보고 자란 수많은 멘토들 덕분에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한국 헌법의 뿌리, ‘그 문장’의 전율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피칭 현장에서 터진다. 김선호 대표가 ‘한국인의 결의문’을 공개하는 장면이다. 이 결의문에 “우리는 정부가 바로 피치자로부터 나오는 권력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문장이 담겨 있고, 이것이 훗날 대한민국 헌법의 뿌리가 됐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저한테는 이 사실이 가장 매혹적이었어요. 그래서 초반에 숨겼다가 피칭 당일에 공개하는 구성을 짰죠.”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가 외쳤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사. 그 유래가 24살의 유일한이 써서 낭독한 결의문에 있다는 사실. 이 연결고리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의 평균 교육 수준이 높잖아요. 그러니까 유일한 박사가 땅굴 파고 어딘가를 폭파하는 장면까지 안 보여줘도 돼요. 그냥 빛나는 그 문장. 우리가 광화문 광장에서 맨날 촛불 켜고 외쳤던 것들의 유래를 보니 이렇구나, 그 울림만 전달돼도 충분할 거라고 봤어요.”

◇거인을 다시 바라보는 일
윤태호 작가는 과거 인터뷰에서 “인간의 보편성을 탐구해야 세계화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유일한 박사에게서 발견한 보편성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유일한 박사님은 보편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에요. 모든 삶이 드라마 소스에 가까울 정도로. 우리가 영웅이라고 할 때, 내가 쉽게 따라하기 어려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말하잖아요.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전혀 보편적이지 않아요. 너무나 위대해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보편성을 이분을 흠모하는 우리한테서 찾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닮고 싶고, 경외감을 갖고, 내 다음 세대가 이분을 보고 좀 더 단단한 내면을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 지점에 보편성이 있다고 봤어요.”
그렇게 생애 첫 외주 작업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창작자들이 우리 시대의 거인들에 더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칭송의 대상으로서의 거인이 아니라, 장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누군지는 우리가 알아야 할 사람들이요.”
“언젠가 기회가 되고 때가 된다면, 그리고 마음에 꽂히는 분이 있다면 그때는 외주가 아니라 오리지널 작품으로 접근해볼 필요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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