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 테스트 다음은 ‘폰트’
화면 덜 보게 만드는 기술
볼보식 안전 철학의 확장
자동차 제조자 중 ‘안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는 단연 볼보다. 3점식 안전벨트를 비롯해 볼보는 안전에 대해선 늘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집착으로 차별화를 만들어 왔다. 그런 볼보가 이번에는 자동차 구조도, 센서도 아닌 전혀 다른 영역에 손을 댔다. 바로 차량용 글씨체, 폰트다.

볼보는 최근 차량 내 디지털 화면 전용 글씨체인 ‘센텀(Centum)’을 공개했다. 계기판과 센터 디스플레이, 각종 알림 메시지에 쓰일 이 폰트는 단순한 디자인 변경이 아니다. 목표는 분명하다. 운전자가 화면을 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글자의 굵기와 모양, 자간까지 다시 설계하겠다는 발상은 이 브랜드가 왜 ‘안전의 기준’으로 불리는지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가독성이 곧 안전이 된 이유
볼보가 센텀 폰트를 개발한 이유는 현재의 자동차 실내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요즘 차량은 물리 버튼이 사라지고 대형 디스플레이가 중심이 되면서, 운전자가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이 과거보다 훨씬 길어졌다. 실제 연구에 따르면 운전자는 주행 중 평균 수십 초를 센터 스크린에 소비하며, 이 시간 동안 차량은 축구장 여러 개 길이를 아무런 시선 통제 없이 이동하게 된다. 볼보는 이 지점을 위험 요소로 판단했다.

그래서 센텀은 ‘보기 좋은 글씨’가 아니라 ‘즉시 읽히는 글씨’를 목표로 만들어졌다. 볼보 UX팀은 글자를 인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장식과 시각적 잡음을 최대한 배제했다. 글자의 획은 명확하고, 내부 공간은 넉넉하게 열려 있으며, 숫자와 알파벳이 헷갈리지 않도록 형태를 세밀하게 구분했다. 보는 순간 해석이 끝나고, 시선이 머무르지 않게 만드는 것이 핵심 설계 원칙이다.
이 폰트 개발에는 글로벌 타이포그래피 스튜디오 ‘달튼 매그(Dalton Maag)’가 함께 참여했다. 이들은 인지 심리학과 시각 인식 원리를 기반으로, 운전 중 눈의 움직임과 정보 처리 속도까지 고려해 글자를 다듬었다고 한다. 글자 간 조합, 크기 변화, 배치 방식이 모두 ‘한 번의 시선 이동으로 더 많은 정보를 읽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맞춰져 있다.
디지털 시대의 볼보 아이덴티티
센텀이라는 이름에도 볼보다운 의미가 담겼다. 이 폰트는 2027년 볼보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개발됐으며, 브랜드의 다음 세기를 준비하는 상징적 요소로 자리 잡을 예정이다. 단순히 새 차에 적용되는 UI 요소가 아니라, 앞으로 볼보가 추구할 디지털 경험의 기본 단위가 되는 셈이다. 실제로 볼보는 센텀을 통해 화면 속 그래픽 요소를 줄이고, 정보 전달에만 집중하는 방향으로 인터페이스를 정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폰트가 완전히 미래적인 디자인만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센텀의 형태에는 과거 볼보의 디자인 유산도 은근히 녹아 있다. 직선 위주의 안정적인 비례, 과도하지 않은 곡선, 단단한 인상은 1990년대 볼보 세단을 떠올리게 한다. 안전벨트의 대각선, 테일램프의 수직 라인 같은 브랜드 상징 요소도 글자 형태에 반영됐다. 결과적으로 센텀은 안전과 브랜드 정체성을 동시에 담아낸 폰트가 됐다.

이 새로운 글씨체는 2026년 초 공개 예정인 전기 SUV EX60에 처음 적용될 예정이다. EX60은 볼보의 차세대 핵심 모델 중 하나로, 새로운 소프트웨어 구조와 UX 철학을 담은 첫 양산차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센텀은 이 차를 통해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실제 주행 환경에서 검증받게 될 예정이다.
차별화 어려운 시대의 해법
물론 모든 이들이 볼보의 선택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물리 버튼을 늘리는 게 더 확실한 해결책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제조사들이 터치스크린 일변도에서 벗어나 버튼을 다시 늘리고 있는 흐름도 있다. 하지만 볼보는 디지털 전환이라는 큰 방향을 되돌리기보다는, 그 안에서 위험 요소를 줄이는 방식을 택했다. 버튼을 늘리기보다, 화면을 덜 보게 만드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폰트까지 안전 설계 영역으로 끌어들인 이번 시도는 볼보라는 브랜드를 가장 잘 설명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충돌 테스트 결과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려운 시대에 볼보는 여전히 ‘사고를 줄이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센텀 폰트는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그 집요함만큼은 대형 구조물 못지않다. 안전에 진심인 브랜드가 결국 도달한 지점이 글씨체라는 사실 자체가 볼보다운 답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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