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터 하나로 사위를 내쳤다”…육영수 부친이 박정희를 끝까지 반대한 내막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대통령 부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만남 뒤편에는 장인의 완강한 반대와 집안의 깊은 갈등이라는 극적인 비화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다시금 조명받은 두 사람의 결혼 비화는 당대 옥천 최고의 대지주였던 장인 육종관과 청년 장교 박정희 사이의 팽팽했던 신경전에서 출발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말 피란 수도 부산에서 시작됐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이던 박정희 중령(당시 소령에서 진급 무렵)은 육영수의 외사촌 오빠이자 대구사범학교 1년 후배인 송재천의 주선으로 영도 인근의 한 식당에서 육영수를 처음 대면했다. 단아한 기품의 육영수에게 마음을 빼앗긴 박정희는 얼마 지나지 않은 두 번째 만남에서 곧바로 “결혼합시다”라며 저돌적인 청혼을 건넸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신부의 아버지 육종관이었다. 충북 옥천 일대에서 3천 평에 달하는 대저택을 거느린 거부이자 완고한 성정의 대지주였던 그는 군인이라는 신분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전란 속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직업 군인에게 가문의 소중한 차녀를 시집보낼 수 없다는 완고한 고집 때문이었다.
결정적인 파국은 예비 사위가 인사를 오던 날 터져 나왔다. 긴장감이 흐르는 자리에서 박정희는 한쪽 무릎을 세워 팔을 얹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지포 라이터를 ‘딸깍딸깍’ 만지작거렸다. 군인 특유의 반골 기질과 당돌한 태도를 오만함으로 받아들인 육종관은 불같이 폭발하며 호통을 쳤고, 그 자리에서 혼담을 전면 결렬시켰다.
파혼 위기에 놓인 혼사를 되살린 이는 어머니 이경령이었다. 남편의 수많은 첩실 살림과 가부장적 독단에 깊은 염증을 느끼고 있던 이경령은 딸의 사람 보는 안목과 박정희의 묵직한 인간성을 신뢰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편 몰래 딸들을 데리고 대구로 가 조용히 약혼식을 치렀고, 육영수 역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집을 나와 대구로 향했다.
1950년 12월 12일 오후, 대구 계산성당에서 두 사람의 신식 혼례가 거행됐다. 허억 당시 대구시장의 주례로 진행된 이 날 식장에는 장인 육종관의 자리가 끝내 비어 있었다. 육종관은 딸의 결혼식에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사위가 5·16 군사정변을 거쳐 최고 권력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청와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라이터 소리 하나로 시작된 장인과 사위의 서슬 퍼런 자존심 대결은 사위가 국가지도자가 된 이후에도 꺾이지 않았고, 이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이면에 남은 가장 독특한 가족사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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